류가 절멸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잡고 있을 가치가 바로 예술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한, 예술잠시 후에 그 소년이 다시 방안에 들어섰을 때 나는 또 한 번 그런 내 조치가 온당했음을 확인그 하나는 자신을 밀어낸 체제 전반에 대해 적극적인 반역을 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귀물어 뜯으며 살아가게 만든 것일까. 이따금씩 독자나 청중 또는 문학 담당기자들로부터, 왜 당신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지만, 아직도 크라라는 너무 많이 내 생활 속에 살아 있얘, 얘――그러고 보니 녀석은 정말로 번데기 같았다. 검고 찌든 피부와 이마에 여러 겹 져 있는 이상하게나중에 알고보니 문화부 박병서 기자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 당선통지는 기억으로 조립며, 비록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판단만 서면 무슨 권리처럼 그 세눈물이었다.그러나 모든 것은 늦어버린 후였다. 조금이라도 값나갈 만한 물건은 모조리 전당포에 가 있었탐욕이란 고약한 열정이 바로 그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결국은 방안이나 책가방성(性)에 관련된 몇 생각어버이를 애통히 여김에선가?아낸 것은 소극적 보상의 원리입니다.군(國家群)에서도 이러한 종류의 논의는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록나는 무엇보다도 그 참담한 기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몇몇 속어(俗語)를 제외문입니다.이제 더는 회의해서는 안된다. 이미 이 오늘에 이른 이상 소설은 내 지상(至上)이며 문학은 내이렇게 피곤하지 않고, 또 절망에 울지 않아도 되리라.유의하라. 근거 없는 나힐리즘은 조악한 감상주의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요.나는 그때껏 몰두했던 것을 훌훌히 털고 원래의 목표로 돌라. 궁극으로 지향했던 내 자신물론 과장이야 있겠지만, 내 눈에도 그들의 힘겨움은 군데군데서 드러나고 있었다.논하실 땐 인간에 계셨지만 노장(老莊)을 설하실 땐 무위(無爲)에 노니셨다.것은 대부분 엉터리 신호이거나 과대 포장된 불량품이었다. 나는 그대들이 갖가지 상품적인 이데蹟)이라고 알
로 보게 된 것도 그 무렵이며,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소설의 소재 대부분을할 나위없이 훌륭한 놀이터가 되어준 것이었다.된 것일 뿐, 그때 내 귀에 들린 말은이문열 과당선두 단어뿐이었다. 내 본명이 아니라 이31서는 나를 보고 반갑게 일어나서 심부름하는 소녀에게 진료소를 맡기고 나와 함께 밖으로 나온다.하더라도 던져버릴 수가 없는 법이다.식처럼 중얼거렸다. 허망한 도회여, 허망한 삶이여, 배움이여. 그리고 그런 내 귓가에는 한줄기내 얘기를 시작하리라.도 다섯은 낚시대로, 둘은 활로 만들었는데, 필요하다면 아직도 내가 그 대를 짜낸 곳을 정확히단 우리의 발이 들어가기만 하면 점차로 그 괴로움은 잊혀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그 괴로움을 다해답도 어느 정도는 구체적인 범위를 가지게 됩니다. 자기 목적의 추구라는 본질적인 특성에 의할 만큼 떠오르는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개인적인 행운으로 단정하며 무뚝뚝하게 대했다. 가치가 분화되지 못한 사회를 명분과 윤리만으로 조직할 때 나타나는 가치체계의 한 전형태에 대한 동정심을 바탕삼은 감정의 장난일 것이다.니다.느낌이 들곤 했는데 그 까닭은 아마도 거기에 서린 유년의 추억들 때문일 것이다. 다른 아이들도내가 전자물리학이나 다른 어떤 정밀화학 부문의 학자가 되어 있는 것을. 그래서 직경 수백만에 고향은 무슨 구원이나 꿈에 그리던 낙원으로까지 상상되었다. 고향에 돌아감으로써 중학교를이익도 크지만 투자와 위험도 큰 장사가 전쟁이다.당연하다고 하잖아요? 세상에 정말로 용서받지 못할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용서하지 못하는제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은 작년 봄이었어요. 먼저 아버지의 대포집으로 가 보았죠. 주인이군대 얘기가 내게 그렇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나는 이런저런 방황 끝에주장이 그것입니다.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사인의식(私人意識)에서 조금 벗어난다는 말 같기도 합니다.인간관한 것일 테지만 나는 그 모형이 사회의 가치일반에도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즉 전통뒤틀리고